杏仁의 길 담화 익산 연동리 태봉산 자락을 찾아

길 이야기

杏仁의 길 담화 <50> 익산 연동리 태봉산 자락을 찾아

편집인 0 318 2023.10.18 00:27
석불에 어린, 천년의 전설


금마와 왕궁에서 부여로 통하는 길목,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태봉산 자락에 백제 시대 석불(石佛)을 간직한 태봉사(胎峰寺)와 석불사(石佛寺)가 있다.
태봉산은 마한의 기준(箕準)이 이 산에서 기도하여 세 왕자를 얻고 그 태를 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태봉사와 익산 미륵사지 사이 구간은, 전라북도의 종교성지를 따라 걷는 아름다운 순례길 4코스이기도 하다.   

 태봉사는,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태봉산 북쪽 기슭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사찰이다. 말이 산이지, 깊은 산도 아닌 마을 가까운 곳 야트막한 산자락에 절이 자리 잡았다.
절 규모는 크지 않으나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줄지어 선 아름드리 노거수들이 오래된 천년고찰처럼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경내에 들어서면, 숲을 배경으로 야트막한 비탈에 범종각과 대웅전, 삼성각 등이 모여 있다. 절 앞은 마을과 논이지만, 경내는 마치 깊은 산속에 들어선 듯 아늑하다.     

 태봉사에는 고조선 준왕과 무왕의 전설이 함께 전해져오고 있다.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패해 바다를 건너 익산에 새로운 도읍을 세우고 한왕(韓王)이 된 고조선 준왕(準王)은, 아들을 낳기 위해 영험한 곳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준왕의 꿈속에서, 봉황(鳳凰) 한 마리가 갑자기 솟아올라 자신에게 다가왔다가 다시 미륵산 너머 작은 산에 가서 앉는 것이었다. 꿈에서 깬 왕은 여간 상서롭지 않은 꿈임을 알고 봉황이 앉은 곳을 찾아 그곳에 석불을 세우고 기도에 정진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백일이 지나자 왕비가 임신했고 이후 왕은 연이어 세 아들을 얻게 된다. 이에 왕은 아들들의 태(胎)를 산의 봉우리에 묻은 후 이곳을 태봉(胎峯)이라고 불렀다.”

 태봉산과 관련된 전설은 백제의 무왕에게도 이어진다.
“준왕 때부터 이 산이 영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무왕은 이곳에 움집을 짓고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기도했다. 어느 날 삼존불상이 들판에서 비바람을 맞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무왕은 즉시 사람을 시켜 이곳에 절을 짓게 하고는 태봉사라고 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태봉산이라는 이름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영험한 산이라는 것과, 삼존석불과 함께 백제 시대 유물을 간직한 사찰이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봉사 창건과 삼존석불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옛날 한 여인이 삼대독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산신 기도를 하다가 산신의 현몽으로 아미타삼존불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절은 허물어지고 불상도 땅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1931년경에 삼기면 연동리에 살던 청송 심 씨 묘연화(妙蓮華)라는 여인의 꿈에 나타났다. 여인은 삼대독자인 아들의 수명장수(壽命長壽)를 위해 기도를 드리다 산신의 현몽으로 태봉산에 와 꿈에 본 곳을 파 보니 삼존석불이 있어 이곳에 절을 세웠다.”     
 1955년에 세워진 지금의 태봉사 이야기다. 심 씨는 현재 태봉사의 창건주로 기록된다. 절 안에 그녀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삼존석불

 태봉사 대웅전에 봉안된 삼존석불은 백제 시대 불상이라고 전하는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다. 삼존석불은 서산마애삼존불과 같은 부조 양식에서 한 단계 나아간 양식으로, 백제 후기 불상 양식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귀중한 보물이다.
 삼존석불은, 발견 당시 본래의 모습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호분(胡粉:흰색 안료)을 발라 보수했는데 패인 부분만 석고로 채운 상태라 희미한 외형만 남아 있을 뿐이었고 이목구비 등 세세한 모습은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이를 다시 개작(改作)해서 본존불의 불두(佛頭) 윤곽, 옷자락 등을 뚜렷하게 만들고, 좌우 협시 불(挾侍佛)의 옷자락과 머리카락 다발, 관 등을 다듬었다.
 이 삼존석불은 아들을 점지하는 영험이 있다고 하여 지금도 득남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태봉사에서 남동쪽으로 1km 거리에 석불사가 있다. 사대천왕문도 없는 아담한 절이지만, 이곳 대웅전에 석불좌상(연동리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45호)이 안치돼 있다. 광배 높이 4.48m, 몸 높이 1.69m, 백제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는 최대 불상이다.
 얼굴은 본래 얼굴이 아니지만 아름다운 광배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태봉사 삼존불상과 여러모로 비슷한 면이 많다. 마멸과 석회분 때문에 볼품이 떨어지지만, 석불은 머리만 본래의 것이 아닐 뿐 불신(佛身), 대좌(臺座), 광배(光背)까지 고스란히 남아 백제 시대 불상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석불사 석조여래좌상

 석불의 두상은 원래 것이 아닌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이 지역 사람들 사이에는 석불의 두상이 왜병 장수에 의해 잘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다.
 “정유재란 때 한양으로 진격하던 한 무리의 왜군이 금마에 들어왔는데, 진격하려고 하면 안개가 짙게 끼어 칠흑 같은 어둠이 되는 사태가 되풀이됐다. 왜군 장수가 염탐을 시켜보니 병사들이 돌아와서, 작은 절에 모셔진 부처님에게 사람들이 몰려가서 왜군이 빨리 사라지기를 기도하고 있더라는 보고를 올렸다. 왜군 장수는 한밤중에 그 석불을 찾아가 칼을 휘둘러 석불의 목을 베었다. 다시 돌아와 진격하려 하는데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조총은 무용지물이 되고 막사도 젖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화약까지 모두 젖어 쓸모가 없게 되자 이때 낫과 죽창으로 무장한 의병들이 습격하여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석불좌상은, 지역의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다가 현몽에 의해 찾게 된 것이라고 한다.
 1930년 어느 날 연동리에 살던 사람의 꿈에 부처 형상을 한 사람이 나타나 “나를 꺼내 달라.”라고 했다 한다. 날이 밝은 뒤 꿈에서 본 땅을 파 보았더니 석불이 묻혀 있어 석불사라는 절을 짓고 모셨다는 것이다. 석불이 있는 곳의 지명도 석불리(石佛里)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 이미 이 석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백제 무왕이 재위 11년경에 선화공주와 함께 태봉사로 기도하러 가다가 미륵사와 태봉사 사이에 있는 이 지점에 가람을 세워 미륵 본존불상을 조성했었다고 한다.   

  1989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이곳 석불사 절터를 발굴 조사한 결과, 금당으로 추정되는 건물 터를 확인했고, 고려시대인 12-13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추측됐다.     

                                                                                                                                _杏仁(마실길 안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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