杏仁의 길 담화 굴곡진 근대역사문화의 집결지, 군산 걷기

길 이야기

杏仁의 길 담화 <48> 굴곡진 근대역사문화의 집결지, 군산 걷기

편집인 0 351 2023.08.03 18:55
군산은 1899년 5월 1일 일제가 강제로 개항시킨 항구도시다. 옥구군에 속한 작고 한적한 어촌이, 고려 때부터 조운을 담당해 전국 12조창 중 하나인 진성창이 있었고 경제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1899년 5월 1일 고종의 칙령에 의해 군산은 개항됐다. 서구 열강과 청국, 일본의 조선 침략 정세를 견제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후 군산은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가,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민족 수탈의 현장으로 빛을 잃었다. 물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민족주의 세력이 싹트는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일제가 쌀을 수탈해 가기 위해 축항 공사를 하고 부산, 원산, 제물포, 경흥, 목포, 진남포에 이어 7번째로 개항했으며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군산 시내에는 일제 강점기의 흔적으로 군데군데 붉은 벽돌로 지은 근대 건축물들과 일본식 주택 등이 많다. 일제 강점기 근대 역사가 남긴 현장이다. 일제 강점기, 격변하는 민족사 한복판에 있었던 군산. 히로쓰 가옥, 군산 세관, 일본은행 지점, 째보 선창 등은 그 시대를 되새겨볼 수 있는 근대유적이다.
 

1908년 지어진 옛 군산세관 건물은 국내에 남아 있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군산의 근대문화유산은 ‘아리랑 코스’와 ‘채만식 코스’ 두 가지 답사길 중에서 볼 수 있다. 아리랑 코스는, 백년광장-구 조선은행-부잔교-구 군산세관-영화동과 월명동 일대-동국사-월명산-수시탑-해망굴로 이어지는 길. 채만식 코스는, 백광장-부잔교-구 조선은행-미두장 기념비-국도극장-동국사-월명동과 영화동 일대-구 군산세관을 만난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2011년 들어섰다. 근대생활관, 옥구농민항쟁기념관, 해양물류역사관으로 꾸며졌다. 근대생활관에는 군산 개항의 역사적 배경, 농토 수탈, 콩나물고개 위의 토막집, 잡화점․인력거 방․ 형제고무신방․술도매상 실물 모형, 군산미곡취인소, 내항창고, 군산극장, 그리고 군산역과 임피역 등이 재현돼 개항기의 삶을 짐작게 한다. 박물관 맞은편 옛 군산세관은 1908년 지어진 건물로 현재는 ‘호남관세전시관’이라는 간판을 정문 옆에 더 달았다. 한국은행 본점, 서울역사와 함께 국내에 남아 있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옛날의 군산 사진이 전시돼 있고 반입물품금지 품목 등도 전시해놓고 있다.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건물과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이 있는 내항사거리에서 남쪽으로 향하면 국내 유일의 일본식 건축 형태 사찰로 유명한 동국사가 나온다. 이 절은 1909년 창건됐다. 불교사찰보다는 일본 신사 같은 느낌이 농후한 동국사는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64호로 등록돼 있다.
동국사 진입로에 고은 시인의 시가 걸린 이유는, 고은 시인이 1951년 이곳 동국사로 출가한 인연 때문이다. 동국사는 1909년 일본인 승려 우찌다 붓깐(內田 佛觀)이 창건한 일본 조동종(曹洞宗) 사찰로, 본래 금강선사(錦江禪寺)였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부 소유가 된 것을 전북종무원에서 매입했는데, 1970년 남곡 스님이 동국사로 개명하고 대한불교조계종에 증여했다. ‘동국’은 ‘해동대한민국’의 준말이다.
 애초 불순한 동기로 세워진 사찰인 만큼 동국사는 일제 강점기 동안 왜색불교 전파와 한반도 강점의 첨병이자 황민화 정책을 촉진하는 담당자 노릇을 했다. 이러한 왜곡된 행태를 사죄하고 참회하는 뜻에서 1992년 일본 조동종에서 참사문(懺謝文)을 보냈다. 참사문을 발췌해 새긴 비석은 동국사 정원에 세웠다. 내용인즉, 제국주의 야욕과 자문화 우월의식에 빠져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훼손한 데 대한 사죄와 참회의 뜻이 담겨 있다. 한국 국민에게는 명성황후 시해와 한반도 강점에 대해 사과했다.

 동국사 인근 신흥동에는 히로쓰가옥이라는 일본식 주택이 남았다.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타짜’ 등 여러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된 곳이다. 신흥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 군산시내 유지들이 거주하던 부유층 거주지역이었다. 포목점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샤브로가 지은 주택으로 (구)호남제분의 이용구 사장명의로 넘어가 오늘날까지 한국제분 소유다. 건물 형태는 목조 2층 주택으로,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고급주택 양식을 띄고 있다. 지붕과 외벽 마감, 내부, 일본식 정원 등이 건립 당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 제 183호로 지정됐다.


해망동과 금동을 연결하는 해망굴은 수산물 집산지 해망동과 군산 시내를 연결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에 뚫렸다.
 
개정동 봉정요양병원 앞 잔디밭에는 병원의 설립자 쌍천 이영춘 박사의 흉상이 서 있다. 이영춘 박사는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지만 보장된 출세 길을 버리고, 옥구군 개정면 구마모토(熊本) 농장의 자혜진료소장에 자원해 농장의 소작농과 인근 농민들의 보건위생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우리나라 의료사업과 정책수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는데, 1973년 옥구군에서 처음 실시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오늘날 의료보험제도의 효시이다. 당시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매달 100원의 조합비를 납부하는 농민이 적어 조합과 병원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끝내 농민 의료지원을 위한 의료보험조합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영춘 박사에게야말로,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수식어가 조금도 헛되지 않겠다. 그는 1951년 개정간호학교를 설립해 전문 간호사를 양성하고, 간호원들을 재훈련하여 학교에 배치함으로써 어린이들의 건강을 돌보게 한 것이 오늘날 양호교사 제도로 발전했다. 이 박사가 설립한 시그레이브병원은 군산개정병원으로 잘 알려졌었다. 이 병원은 미얀마 농촌에 병원을 세우고 농민보건사업에 몸 바친 미국인 의사 시그레이브 추모재단의 후원으로 1970년에 준공돼 지역민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이 박사와 관련된 근대문화유산으로 ‘이영춘가옥’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건물 중 가장 보존이 잘돼 있다. 원래는 일본인 대지주 구마모토의 별장이었는데, 해방 후 박사가 사택으로 이용했다. 일제 강점기 토지 수탈의 상흔이 서린 역사적 공간이자 우리나라 근대의료의 선구자인 이영춘 박사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의료사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_杏仁(마실길 안내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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