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전주! 그 역사의 현장을 말한다(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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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전주! 그 역사의 현장을 말한다(1회)

편집인 0 1,521 2019.12.08 13:10
1980년 전주의 봄은 짧았다

1980년 전주는 여느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민주화 요구와 신군부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가득했다. 유신말기 투옥됐던 이들이 풀려나고 대학에서 쫓겨났던 학생들이 돌아오면서 대학은 활력을 되찾았다. 오랜 독재권력에 억눌렸던 민주화 욕구가 사회 곳곳에서 봄 눈 녹듯 넘쳐흘렀다. 18년간 장기집권에 눌려 왔던 개개인의 소망이 폭발하는 건 당연했다. 한 인사는 "시국을 지켜만 보는 것과 나서서 행동을 하는 것은 백지 한 장 차이였다"며 당시의 분위기를 회고한다. 비록 행동에 나서지 않은 국민이라 할지라도 민주화에 대한 소망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그래서 전주, 그리고 전북의 민주화 투쟁 역시 다른 지방 못지 않게 점점 커져 가고, 점점 강도가 높아져 가는 상황이었다. 유신정권에 저항해 오던 성직자들과 양심적 지식인들, 대학 내의 저항세력들은 서슬 퍼런 신군부의 탄압에 맞서면서 그 활동 반경을 넓혀 간다. 학원자율화 투쟁으로 시작해서 그 세를 결집한 대학생들은, 신군부에 민주화일정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투쟁의 수위를 높여 간다. 전국 어디서나 마찬가지였듯 양심세력의 저항과 대학생들의 거센 시위가, 쿠데타의 꿈을 꾸던 신군부의 간장을 압박해 온 것이다.
80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투쟁에 나서고 계엄사에 붙잡혀간 이들 중 많은 사람은 그저 평범한 학생, 평범한 시민이었다. 학생 운동의 선봉에 나서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 가던 젊은 사상가도 아니었고,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의 연장선상에서 신군부를 압박하던 반정부 인사도 아니었다. 더구나 피투성이로 울분을 토하던 광주의 시민군도 아니었다. 80년 민주화의 봄이라고 하는 어수선한 계절을 대학에서 맞았거나,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했거나 하는 젊은이들일 뿐이었다. 이런 이들이 5.18 관련자, 5.18피해자라는 범주에 들게 된 것은, 단 하나 우리 사회가 정정당당하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었다.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소망 때문에, 이들은 각자 자신의 삶에서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아픔을, 또는 멍에를 안게 된 것이다. 더러는 대학의 신입생으로서, 동아리의 막내로서, 더러는 자신이 믿는 종교에 충실한 신앙인으로서, 어쩌면 각자가 전혀 다른 인생의 꿈을 가진 사람들이기도 하다. 하기야 앞선 사회의식과 세계관에 눈뜨고 앞장서서 투쟁한 젊은이들도, 소박한 꿈이 없을 수는 없다. 당시 대학 4학년이던 학생들 중 많은 이는 교생실습을 해야 하는 학기가 바로 그해 봄이었다. 지금은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어떤 이는, 그해 봄 검거망을 피해 숨어 지내면서 교생실습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못내 아쉬웠다고 했다.


드러난 사건들을 토대로 보면, 80년 전주, 전북의 민주화투쟁은 크게 세 가지의 단면에서 읽어 볼 수 있다. 먼저, 5월초부터 줄곧 시위와 농성으로 이어진 대학생들의 가두투쟁이다. 3월 개강 이후 대학생들은 복적생(긴급조치 위반으로 학교에서 쫓겨났다가 돌아온 재입학생)들의 주도 아래, 서클(동아리)과 각 학과의 연합을 기반으로 하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한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는 학생들 스스로 선거를 치뤄, 유신정권의 잔재인 학도호국단 체제를 무너뜨리고 총학생회장 체제를 탄생시킨다. 학원 민주화의 많은 요구사항을 관철해내는 시점에서, 학생들은 신군부가 주도하는 계엄정국을 타개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 투쟁에 나선다. 도청 앞까지 밀고 나갔던 전북대생들의 대규모 시위, 이세종 열사(5.17 당시 사망)의 순교지가 돼 버린 전북대 학생회관의 농성 현장 등은 젊은 대학생들의 실천의지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둘째는, 5.18 이후 광주의 비극적 참상을 국민들에게 전하려고 몸부림친 젊은이들의 절박한 투쟁이다. 5.17 쿠데타 직후 단절된 광주의 참상이 탈출한 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이 비극의 실상을 국민들에게 알리려는 노력이, 여러 건의 유인물 살포 사건과 고교생 시위 사건으로 드러난다. 광주의 비극을 전할 수 있는 언론보도가 차단된 와중에서 유일한 언론매체가 돼 버린 흑백 유인물은, 더러는 거리에 뿌려지자마자 수거되거나 더러는 운반 도중에 압수됐지만, 그 작은 사건, 사건들은 꼬리를 물고 많은 국민들에게 전파된다. 이 곳 저 곳의 작은 모임을 통해 조직된 크고 작은 시위 사건 역시, 비록 확산되지 못한 채 탄압의 군화 발에 짓밟혔지만 그 현장의 주인공들에게는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셋째는, 계엄령 속에 예비 검속 대상이 돼 탄압 받던 인사들과 복적생들이다. 이들은 이미 유신정권의 탄압을 견뎌 왔고, 79년 10.26 이후에는 좀 더 조직적인 방식으로 민주화 욕구를 모아 내는 적극적 역할을 감당했으며, 시위의 주동자로, 또는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낙인찍혀 붙잡혀 갔다. 이들에게 80년 5월은, 다만 몸을 피하고 누군가에게 꼬리를 잡혀 붙잡히는 수배, 검거의 과정만이 아니다. 남보다 한 발 먼저 사회 현실에 눈을 떴다는 이유 때문에, 이들은 앞장서는 입장이 되었고 감시 받는 상황에 놓였으며, 더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들은 이미 80년 봄 민주화투쟁 이전에도 이른바 '지하서클을 통한 의식화운동'의 주도자였고, 박정희 정권이나 신군부에게 '빨갱이 또는 빨갱이 같은 놈들'로 낙인찍혀 왔다. 8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운동세력은 스스로 민족민주운동, 민족민주세력이라 일컫게 되지만, 국민들로부터는 여전히 '운동권 학생들'이라거나 '재야인사'로 불려왔다. 허나 이것도 한참 나중 일이다. 유신정권 직후인 80년 봄만 하더라도, 이들은 극소수의 저항세력이었고, 언제나 "살얼음판 위를 걷는" 이 사회의 반체제인사였다. 그러나, 전북대를 비롯해 우리 지방에서 80년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거나 연루됐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미미한 움직임으로만 비쳐 왔다. 허나 이들의 삶은 이들만의 삶이 아니었다. 이들이 흘린 땀과 피눈물, 이들의 상처는 23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서는 80년대를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범주화해서 불러 왔다. 80년대는 우리 시대의 일부였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빛나는 성취의 시기였다. 80년 봄의 민주화투쟁은, 바로 이렇게 고유명사처럼 돼 버린 '80년대'의 주춧돌이자, 밑거름이 되었다. "과거에 집착하면 한 쪽 눈을 잃고 과거를 잊으면 두 눈을 다 잃는다"는 말이 있다. 80년 봄, 이 땅을 수놓았던 뜨거운 청춘들의 노래는 어쩌면 우리의 두 눈을 잃지 않기 위해 반드시 간직해야 할, '그런 과거'일지도 모른다.

#펌: http://blog.daum.net/easycopy(행인(杏仁)김수돈 블로그 '온두레미디어')
(이 글은 2003년 5월 13일자 전민일보에 게재한 5월특집시리즈 1회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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