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혀 있는 시간들- 1980년 5월 전주! 그 역사의 현장을 말한다(4회)

온고을 기록창고

붙잡혀 있는 시간들- 1980년 5월 전주! 그 역사의 현장을 말한다(4회)

편집인 0 1,487 2020.03.04 17:46
붙잡혀 있는 시간들
- 1980년 5월 전주! 그 역사의 현장을 말한다(4회)


투사가 되어
1980년 5월 전북대 학생회관은, 여느 대학의 상황과 비슷하게 전주지역 민주화 운동의 본거지가 돼 있다. 계엄당국의 예비 검속으로 오갈 데 없게 된 수배자들이 2층 방송실 등에 진치게 되면서 학생회관은 자연스레 농성장으로 변해 간다. 수배자들은 고정적으로 학생회관에서 숙식을 했고, 서클연합회, 학자추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이 합류, 토론하며 밤을 지새운다. 5월 2일 도청 앞 시위를 전후해서 학생회관은 본격적인 농성장 분위기가 형성되고, 적을 때에는 10여명, 많을 때는 백여 명이 밤을 지새운다. 당시 학내 분위기는 학생 수도 많지 않을 뿐더러 학생회관을 드나드는 이들은 서로 친숙해, 무척 가족적이다. 시위는 조직적인 몇몇 동아리가 선도투(시위대를 주도)를 벌임으로서 시작된다. KSCF, 흥사단아카데미, 아람회, MRA 같은 동아리들이다. 또, 몇몇은 앞장서서 목이 터져라 시위를 이끈다. 복학생 이광철(철학 4)을 비롯해 78학번 김형근, 김중길 등이 이들이다. 시위가 끝나고 나면 학생회관에 모여들어 함께 대책을 논의하고, 거리에서 배포할 유인물을 써서 찍어낸다. 농성장에는 학생운동조직의 일원은 아니면서도 자연스럽게 시위대열에 합세하면서 자연스레 합류하고 투사가 되어간 이들도 여럿 있다. 농성장 멤버 중 유인물 살포조인 이승희(경제 3)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 이 공간에서는 해방감으로 바뀐다'고 술회한다. 학생들은 당시 유인물 살포조를 따로 만들어 거리에 유인물을 살포한다. 5월 항쟁의 첫 희생자가 되는 고 이세종도 이중 한 명이다. 그 때 그 때 선배들의 지도로 꾸려지는 유인물 살포조는 모두 30여명이나 되지만, 나중에 최순희, 이승희, 정선경 등이 다 책임을 뒤집어쓰고 다른 이들을 빠져나가게 한다(박종훈의 회고). 시위하다 다치고 돌아오는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이 달려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기도 하고, 오갈 데 없는 동료들을 위해 밥을 지어 먹인다. 농성현장의 한 사람인 김성숙(당시 국문 79)은 '5.18민중항쟁전북동지회'의 인터넷 카페를 통해 이렇게 회고한다. "지나가던 행인처럼 오며가며 모여 있는 학생들의 웅변적인 연설에 귀를 기울이던 저는 학생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5월 대대적인 시위가 남도주유소와 도청을 오며가며 확산되었고, 저는 우연히 농성장에 가서 학생들의 식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게 되고 도움이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많은 여학생들과 아주머니들과 교회에서 보내준 음식으로 그 당시 식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저 역시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도와준 많은 여학생들 중 하나였어요." 학생들이 연일 시위와 농성을 계속하는 사이, 비용조달도 큰 문제다. 현수막이나 유인물 같은 시위용품을 만드는 것도 그렇고, 한창 나이의 청년 2백여 명이 숙식을 해결하자니, 자연 총학생회 예산이 막대하게 지출된다. 5월 15일 경인가 해서 비용을 점검해 보니, 백 만원을 훌쩍 넘는다. 5월 2일 시위 때 회장, 부회장이 잡혀가고 없어 학교로부터 돈을 타는 게 문제다. 결국 총학 간부 한 사람이 회장 대신 청구서에 서명을 해 학교에 돈을 신청하게 된다. 나중에는 전주경찰서로 잡혀간 학생들 60여명의 사식도 이렇게 조달해 35일을 먹인다.

계엄 병력 이동 속 가열되는 시위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뜨거워지면서 5/15봉기설이 끈질기게 나돌자 김영삼, 김대중씨는 각기 기자회견을 통해 계엄령 해제, 임시국회 소집, 개헌 작업 중지 등을 요구하는 성명을 낸다. 그러나 신민당의 임시국회 소집 요구에 공화당은 20일 이후에나 국회를 소집하겠다고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며 시국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진다. 이렇게 정치권이 미로를 헤매고 있을 때, 신군부는 전국의 주요도시에 충정부대를 투입할 계획을 최종점검하며 일부 병력은 이미 점령목표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한다. 80년 5월 14일 새벽,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 서울지역 27개 대학의 총학생회 대표 40여 명이 모여 14일 오전부터 전면적인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한다. 80년대 한국사회의 운명을 결정지은 나흘이 이 순간부터 시작된다. 전국의 대학생들의 노도와 같은 가두시위로 80년 봄의 가장 적대적인 두 세력, 학생운동과 신군부 간의 사활을 건 전면전이 시작된다. 5월 14일 정오, 서울시내 대학생 7만여 명이 일시에 교문을 박차고 나온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는 영등포, 청량리 등을 거쳐 광화문으로 진출한다. 가두시위에 시민들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타오르기 시작한 가두시위투쟁의 불길을 막을 방법은 없다. 같은 날, 전남대생들은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진출하고, 전주에서는 전북대생 3천명이 거리로 나와 전북도청 앞에서 연좌시위를 한다. 경찰병력과 충돌해 학생 61명, 경찰 43명이 부상한 것으로 집계된다. 15일 오후, 서울역에는 10만에 육박하는 학생들이 집결하던 시각, 전북대생 8백여 명은 연 이틀째 가두시위를 벌인다. 이번에는 교수 20명이 함께 나와 시위대를 보호한다.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시위대는 고사동 오거리에서 2만여 명이 되고, 전주 역(현 전주시청 자리)앞 시위를 벌인다. 대구, 광주, 부산, 인천, 목포, 청주, 춘천, 천안 등 대학이 있는 거의 모든 도시가 다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러나 서울역 광장에 집결한 각 대학 대표들은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투입될 가능성이 짙고, 쿠데타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6일 밤 이화여대에서 서울지역 25개대, 지방 2개대 학생 대표가 회의한 끝에 시위를 중지하고 시국을 관망하기로 결의한다. 16일에는 전남대와 조선대, 광주교대생들이 전남도청앞 광장에서 집회를 열어 횃불행진을 벌인다. 바로 그 무렵 신군부는 치밀하고도 무자비한 음모를 착착 진행한다.


[군화발에 짓밟힌 토요일 밤]
5월 17일은 토요일이다. 많은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오후, 대학의 교정은 조용하다 못해 평화롭다. 그러나 전북대 학생회관은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들려 오는 얘기로는 오늘이 D데이라고도 한다. 농성학생들은 향후 대책을 논의한다. 몇몇 단과대학에서도 술렁이는 분위기가 전해진다. 밤 9시를 넘어 잔디밭에 나와 논의하던 학생들은 방송국과 전화를 통해 결국, 5월 18일 비상계엄 확대와 더불어 계엄군이 학내로 진입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이미 수배중이던 복적생들 가운데 김운주가 남아 농성장을 이끌고, 나머지는 검거될 것에 대비해 먼저 몸을 피하기로 한다. 이광철, 박종훈, 최인규, 이송재, 윤성모,김남규 등은 18일 자정 계엄군 진입 직전에 학교를 빠져 나와 학교 근처에 마련해 둔 '집'으로 간다. 이 시각, 이미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계엄포고 10호를 발표한 신군부는 18일 자정,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을 각 대학마다 투입해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한다. 당시 계엄군은 '학교점령시각'을 전북은 새벽 1시 30분 이전에, 전남은 18일 새벽 2시 30분 이전에, 완료하도록 지시한다.
농성현장에서, 김성숙은 다음날 쓸 '데모가'를 녹음하려고 방송실로 간다. 7명이 모여 '흔들리지 않게' 등 노래를 녹음한 뒤 친구 김혜숙과 함께 여학생회장실로 잠을 자러 간다. 한 남학생이 긴장된 방안 공기를 의식해서인지 "군인들 안 오니 걱정 말라"면서 소주나 사서 마시자고 주머니 돈을 걷는다. 그러나 남학생이 나가고 일, 이분도 안돼 요란한 군화발 소리와 함께 무장군인들이 뛰어 든다. 익산 금마에서 4대의 트럭에 분승해 출동한 제 7공수여단 소속 계엄군들이다. 순식간에 전북대 학생회관을 포위하고 계단을 뛰어오른 군인들은 고함을 치며 학생들을 엎드리게 하고는 이내 몽둥이로 사납게 두들겨 팬다. "베레모를 비스듬히 쓰고 총에 칼을 꽂고 등장한 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은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몹시 화가 나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몽둥이를 들고 때리던 군인들의 무장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초라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학생들은 맞았습니다. 무장군인과 무장이 안된 학생들의 대비는 허무했습니다. 학생회관의 불을 환하게 밝히고 무장한 군인들은 여기저길 다니며 학생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잡힌 우리들은 좁은 차안에서 3시간 이상을 움직이지 못하게 묵인 상태로 기다립니다. 어디에선가 죽을 것 같다고 손목이 조여와서 죽을 것 같다고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도움이 되어주질 못했습니다. 소주를 사러간다고 나간 남학생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잡혔다면 얼마나 힘없이 맞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습니다. 그만큼 군인들의 기세는 대단해 보였습니다."(김성숙의 회고) 그리고 학생회관 뒤에선 이세종(농학 2)이 숨진 채 발견된다. 전북대에선 34명, 원광대는 23명이 연행된다.

 #펌: http://blog.daum.net/easycopy(행인(杏仁)김수돈 블로그 '온두레미디어')
(이 글은 2003년 5월 16일자 전민일보에 게재된 5월특집시리즈 기사 4회 원고입니다)

, , , , , , , , , , , , , ,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