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에게서 듣는 옛이야기 엄정훈 씨 편

평화동

어른들에게서 듣는 옛이야기 <13> 엄정훈 씨 편

정선아기자 0 124 04.07 22:32

피난길 고난 딛고 자라, 봉사하며 살아요


엄정훈 어르신은 유년기에 6.25를 겪었고 청년기에 월남전에 참가한 전쟁 세대다.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영어 강습, 색소폰 강습으로 봉사하며 산다.


평화동마을신문 연중기획 그땐 그랬지

어른들에게서 듣는 옛이야기 <13> 엄정훈 씨


1960~70년대는 이제 역사책이나 소설책에서나 접할 수 있는 시대다. 마치 오래된 영화 속으로 들어가듯, 어르신들에게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늘날과 사뭇 다른 삶의 문화를 엿본다.

평화동마을신문이 지난해부터 마련한 연중 기획 그땐 그랬지’, 어른들에게서 듣는 옛이야기를 올해에도 다시 이어간다. ‘그땐 그랬지’ 13화는, 해방 즈음에 태어나 어린 시절 6.25전쟁을 겪은 엄정훈(79. 사진) 어르신 이야기다.

 

평화동의 꽃밭정이노인복지관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활동하는 엄정훈 어르신! 어르신은 색소폰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어서 무료 색소폰 강습도 하신다.

 

1 때 맞은 6.25 전쟁, 한강다리 폭파도 목격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 학교 다니는 도중에 전쟁이 일어났어요.

육군 중령인 아버지는 부대에 계시고, 저는 만삭인 어머니랑 외삼촌과 서울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했어요. 어머니의 고향인 완주 고산으로 내려가는데 꼬박 15일을 걸어갔어요. 한강 다리가 폭파되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길가에서 자고 굶기를 밥 먹듯하며 걸어간 피난길

피난길엔 밤이 되면 길가에서 잤고요. 길가 밭에 있는 가지 따서 목숨 연명했어요.

마을을 지나가다 밥을 얻어먹으러 들어가면 거절당하는 게 일이었어요. 왜냐면 그 집 식구들도 먹을 게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가 그땐 다 그렇게 굶기를 밥 먹듯이 했어요. 충청도 즈음에서야 어느 친절한 어르신이 시커먼 꽁보리밥과 감자를 줘서 그걸로 끼니를 해결했어요

하루는 배가 너무 고파서 길가 과수원에 있는 새파란 포도를 따서 허겁지겁 먹고는 설사를 하며 복통을 앓았어요.”


길에서 마주친 북한군 장교가 건네준 건빵

어느 날은 북한 인민군들이 가로수 양쪽 도로를 쭉 늘어서 행진을 하는 거예요. 우리와 마주쳤는데요. 말을 탄 장교가 저를 보고 어딜 가냐 하고 물어봐서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 피난 간다고 했어요. 그러자 장교가 말에서 내려 안장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제게 줬는데 그게 건빵이었어요. 외삼촌과 엄마랑 오도독오도독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몰라요.”


강 건너다 물에 빠질 뻔한 만경강 목천포

익산 목천포 다리에서는 총소리가 어찌나 무섭게 나는지 교각 밑에 숨어 있기도 했어요. 강물이 깊어 제가 건너지 못하고 물에 빠질 뻔하니까 임신한 엄마가 나를 업었는데 채 일어서지 못하시는 거예요. 외삼촌 도움으로 겨우 물 건너 외갓집을 갔어요.”

 고산 외가에 도착해서도 우리 식구는 땅속에 숨어 살았어요. 밤이 되면 북한군이 산속에서 내려와 양식 약탈해가고 장정들을 끌고 가고 그랬거든요.

외가로 내려온 지 얼마 안 돼서 어머니가 동생을 낳았는데 그만 사산을 했어요. 그 순간 엄마 곁에서 본 기억으로, 제 눈에는 너무 이쁜 여동생이었어요. 지금도 그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파요. ”

 이런 일도 있었어요. 아버지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소식도 없고, 그러다가 살아 돌아오셨는데 얼마나 좋아요. 우리 아버지 역시 우리 어머니더러 당신이 살았으면 주려고 내가 반지를 구해왔어. 근데 죽었으면 이 반지를 못 주겄다 했어. 이렇게 말하시면서 반지를 꺼내신 거예요. 그때가 생생해요.”

 

봉사가 행복한 지금

제가 이렇게 어린 시절에  6·25를 겪었고 커서 군대에 가서는 베트남 전쟁에도 참여했어요. 이런저런 경험이 많아요. 또 기회가 되면 그때 그 시절 이야기 들려드릴게요.

지금은 복지관에서 영어를 지도하면서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초급반, 생활반 두 개를 하고 있는데 제법 인기가 있어요. 일이 있다는 게 행복이고 보람 있어요. 무료로 봉사하고 있는 색소폰 강습은, 수강생들이 버스킹으로 독주까지 할 수 있는 실력을 만들어드려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어요.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진심을 갖고 이렇게 일하며 살렵니다.” _ 정선아 기자


평화동마을신문 연중기획 <그땐 그랬지!> 인터뷰에 참여해 구술해주실 분을 모십니다. 남녀 구분 없이 1965년 이전 출생인 분으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지나온 이야기를 들려줄 소재가 있으면 됩니다. 이야기 소재는 제한 없습니다. 살던 옛 동네의 풍경이나 오늘날과 달리진 모습도 좋고요.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청년시절, 군대 간 이야기, 신혼 시절, 직장 이야기 등, 오늘날과 무척 다른 아날로그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 연락처: 편집인(010-8411-0200), 정선아 기자(010-2929-7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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